나의 고향은 원주 남쪽 끝, 부론면. 조용하고 순박한 그 땅은 어릴 적 나의 놀이터였고, 지금은 천년의 역사를 품은 유산의 고향이다.
그 중심에는 바로 '법천사지'가 있다.
어린 시절, 나는 국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부론면에서 보냈다. 그때만 해도 법천사지라는 이름보다는 서원이란 마을이 더 익숙했다. 지금은 보상 후 주민들이 모두 이주했지만, 당시엔 마을이 절터 위에 그대로 있었고, 우리는 가끔 그곳으로 소풍을 갔다.
기억은 희미하지만, 그날의 햇살과 웃음소리는 아직도 마음 한편에 선명하다. 친구들과 함께 들판을 뛰어다니며 보물 찾기를 하고, 탁 트인 절터 한가운데서 노래자랑도 했다. 종이상자에 담아 온 김밥과 삶은 달걀, 그리고 엄마가 싸주신 오이무침을 나눠 먹으며 깔깔 웃던 그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.
마을 옆 산자락에 남아 있던 지광국사탑비는 그때도 뭔가 특별했다. 정비되지 않은 채 여기저기 흩어진 돌무더기들, 주춧돌 같기도 하고 어떤 건 그냥 커다란 바위처럼 보였다. 하지만 그중에서도 탑비에 새겨진 섬세한 용 그림은 어린 나에게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안겨주었다. 어두운 돌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용의 형상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.
그때는 몰랐다. 그 탑비와 돌무더기들이 고려시대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품고 있는 보물이라는 것을. 세월이 흘러 나는 그 유산들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, 그때의 기억은 이제 나에게 천년 전 법천사의 숨결로 되살아난다.
그리고 2023년 겨울, 감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. 102년 전 일본으로 반출됐던 지광국사현묘탑이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. 완전히 복원된 그 탑은 이제 법천사지 한복판에서 묵묵히 천년의 세월을 다시 잇고 있다. 어릴 적 마을 옆 그 산자락이, 다시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.
이제 나는 상상한다. 천년 전, 그곳에 울려 퍼졌을 법한 법고 소리와 스님의 염불, 왕래하던 이들의 이야기. 불빛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났을 지광국사의 탑과 그 곁의 탑비. 그리고 그 문화의 흔적을 어린 시절의 내가 무심코 밟고 뛰어놀았다는 사실이, 왠지 모르게 마음을 울린다.
법천사지는 더 이상 잊힌 절터가 아니다. 역사의 귀환과 함께, 나의 추억도 되살아났다.
그리고 무엇보다, 이런 역사가 숨 쉬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참 자랑스럽다. 당장은 고향을 떠나 살아가고 있지만, 내 뿌리는 그곳에 있고, 지금도 그 기억들은 내 삶의 큰 힘이 된다. 시간이 더 흘러도 나는 늘 그 고요하고도 위대한 터전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.
이 이야기를 기억에 더듬어 고향의 역사와 나의 시간을 함께 기록해 본다.
< 법천사지 위치도>
- 법천사지에서, 여기서 나은 사람으로부터
'일상 생각' 카테고리의 다른 글
남한강, 나룻배, 그리고 키다리 아저씨 <나의 어린 나의 이야기> (0) | 2025.04.04 |
---|---|
세 물길이 하나 되는 곳, 해넘이 (0) | 2025.04.02 |
맹사성에 얽힌 이야기? (6) | 2025.04.01 |
바람처럼 흩어지는 기억<외갓집> (0) | 2025.04.01 |
요즘 인간관계 어떤가요? 마음 편한 사람! (0) | 2025.03.31 |